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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스포츠 타임머신] 어느덧 12년, 씨름 최홍만의 격투기(K-1) 진출 '막전막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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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스포츠 타임머신] 어느덧 12년, 씨름 최홍만의 격투기(K-1) 진출 '막전막후'
  • 박상현 기자
  • 승인 2017.02.16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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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FEG서 "2m 넘는 선수 흥행카드" 러브콜…LG 씨름단 해체 3개월만에 데뷔전, 이후 김영현 등 진출 봇물

[스포츠Q(큐) 박상현 기자] UFC가 열리는 주말이면 네이버와 다음 등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에는 언제나 UFC 파이터의 이름이 뜬다. 그만큼 격투기 팬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격투기는 그저 '폭력 스포츠'였다. 오죽했으면 KBS N 스포츠(당시 KBS SKY 스포츠)의 격투기 중계를 놓고 여당 국회의원이 "이종격투기 프로그램을 국내에 처음에 도입했는데 굉장히 폭력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느냐? 이것을 그대로 해야 되느냐?"고 추궁까지 했을까.

격투기 팬들이 해당 발언을 한 국회의원 홈페이지에 찾아가 항의했지만 사과를 받지 못헀고 방송국은 프로그램을 폐지했다. 지금이라면 전혀 생각하지 못할 일이다.

격투기에 대한 잘못된 시선을 바꿔놓은 계기가 길게 생각해 본다면 최홍만의 K-1 진출이 아닐까 생각한다. 최홍만이 K-1에 진출한 뒤 당시 설 곳을 잃어버렸던 씨름 선수들을 비롯해 윤동식 등 유도 선수들의 격투기 진출이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최홍만을 두고 "차라리 씨름이나 계속 하지, 왜 이렇게 얻어맞고 다니면서 계속 격투기를 하려고 하느냐"고 비판하지만 그가 없었다면 격투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이처럼 확 달라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다른 경쟁력 있는 선수가 한국 격투기의 선구자 역할을 했겠지만 최홍만만큼 큰 인기를 끌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다.

지금은 경쟁력이 없는 평범한 파이터가 됐지만 뇌종양 수술을 받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최홍만은 입식타격 격투기 K-1에서 강호로 군림했다. 최홍만에 대한 격투기계의 러브콜은 2004년부터 있었다.

당시 K-1을 주최하고 있던 일본 FEG는 2004년 K-1 서울 대회 기자회견을 열면서 최홍만과 김영현에 러브콜을 보냈다. 다니카와 사다하루 FEG 대표는 "한국에 2m가 넘는 씨름 선수 2명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들의 데뷔를 적극 검토하겠다"고 관심을 보였던 것.

그러나 김영현과 최홍만의 반응은 '콧방귀'였다. 김영현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딱 잘라 말했고 최홍만 역시 "씨름에서 잘하고 있는데 해본 적이 없는 격투기를 하는 것은 좀 그렇다. 나를 인기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것 아니냐"고 경계심을 보였다.

▲ 최홍만은 2005년 K-1 대회를 통해 격투기 데뷔전을 치른 뒤 벌써 12년째 링에서 활동하고 있다. 초기에는 강력한 모습을 보였지만 지금은 파이터로서 경쟁력을 잃었다. 그래도 그가 한국 격투기에 물꼬를 텄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사진= 스포츠Q(큐) DB]

그런데 그토록 경계심을 보였던 최홍만이 가장 먼저 K-1 데뷔전을 치렀다. 최홍만은 어떻게 보면 격투기에 뜻이 있어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사실상 '떠밀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2004년 12월 6일 최홍만이 소속된 LG투자증권 황소끼름단이 모기업인 LG투자증권의 매각으로 해체되면서 최홍만은 순식간에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LG 씨름단이 해체된 뒤 불과 열흘 만에 최홍만이 격투기 진출을 선언했다. 최홍만의 격투기 진출에 씨름계는 크게 반발했다. 그러나 최홍만을 막을 명분이 없었다. 당시 씨름계는 LG투자증권을 비롯한 수많은 기업들이 팀을 줄줄이 해체하며 위기를 맞고 있었다.

LG 씨름단이 해체된지 3개월여 만인 2005년 3월 19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K-1 월드 그랑프리 서울 대회가 열렸다. 최홍만으로서는 3개월의 준비 기간을 거쳐 격투기에 나선 셈이다. 최홍만의 경기를 보기 위해 1만6000여 명의 관중들이 몰렸다.

당시 기자들은 "최홍만이 얻어맞고 골병 드는 것 아니냐"고 회의적인 시선을 내놨지만 일본 FEG가 최홍만을 스타로 만들기 위해 패할 수도 있는 경기를 성사시켰을 리 없었다. 일본 FEG는 최홍만의 8강전과 4강전 상대를 와카쇼요와 아케보노로 결정했다. 두 선수 모두 스모 선수 출신으로 최홍만과 다를 바 없었다. 최홍만은 2명의 선수를 상대로 단 2분 24초만 쓰고 완승을 거뒀다.

최홍만의 결승전 상대는 자신의 절반밖에 몸무게가 나가지 않는 카오클라이 카엔노르싱이었다. 최홍만은 카엔노르싱을 상대로 연장까지 치르며 가까스로 판정승을 거뒀다. 사실 최홍만의 진정한 경쟁력은 여기서 알아봤어야 했다. 그러나 최홍만이 이후 새미 쉴트를 상대로 판정승을 거두는 바람에 그의 문제점은 묻히고 말았다.

최홍만이 K-1에서 성공을 거두자 씨름선수의 격투기 진출은 봇물처럼 터졌다. 김경석을 비롯해 이태현 등이 격투기로 진로를 변경했고 또 다른 '2m 선수' 김영현 역시 2007년 K-1에 나섰다. 물론 이들이 격투기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태현은 격투기계를 떠나 씨름계로 돌아왔고 씨름 해설자로 활약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에 격투기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당시 민속씨름의 몰락과 함께 한다. 지금 씨름이 기지개를 다시 펴고 있지만 1980, 90년대 인기에 비할 것이 못된다. 어쩌면 씨름의 희생이 있었기에 격투기가 주류로 편입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그래도 씨름의 희생은 너무나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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