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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현 은퇴, 고마웠어요 '여왕벌' [SQ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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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현 은퇴, 고마웠어요 '여왕벌' [SQ포커스]
  • 민기홍 기자
  • 승인 2017.11.23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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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민기홍 기자] 정대현(39)이 그라운드를 떠난다. 롯데 자이언츠에서는 보여준 게 없었지만 그를 향해 서운함을 느끼는 팬은 극히 드문 것 같다. 한국야구사 최고의 순간에 늘 함께 했던 ‘여왕벌’의 은퇴를 아쉬워하며 추억 한 페이지를 들춰보는 이들이 훨씬 많아 보인다.

2000 시드니 동, 2008 베이징 금. 정대현이 없었다면 한국야구의 올림픽 2개 메달 획득도 없었다. 시드니 때 경희대 재학 시절 대학생으로는 유일하게 대표팀에 합류, 미국 표적선발로 두 차례 등판해 13⅓이닝 2자책으로 이름을 알렸던 그다. 베이징 결승전 땐 1사 만루에서 쿠바 율리에스키 구리엘(휴스턴 애스트로스)을 6(유격수)-4(2루수)-3(1루수) 병살타로 처리, 전승 우승에 앞장섰다.

유격수 박진만이 잡아 2루수 고영민에게 던지고, 고영민이 다시 1루수 이승엽에게 던졌던 그 플레이는 정대현 인생과 KBO리그(프로야구)의 하이라이트 필름이다. 이후 매년 8월 23일이 ‘야구의 날’로 지정됐다. 허구연 MBC 해설위원 특유의 발음에서 비롯된 '궁내 채고의 싱카볼(국내 최고의 싱커볼) 투수'라는 정대현 별명이 바로 이 때 생겼다.

이뿐인가. 2006 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4강, 2009 2회 WBC 준우승,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 2015 프리미어12 우승까지 찬란한 순간마다 정대현은 늘 함께 있었다. ‘직각’으로 떨어지는 변화구에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야구꾼’들이 줄줄이 당했다. 투수 정대현은 야수 이승엽과 더불어 ‘합법적 병역 브로커’였던 셈이다.

국내에선 SK 와이번스 왕조 구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성근 감독 재임 기간인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정대현은 오승환과 더불어 한국 최고의 불펜으로 군림했다. 2000년 창단 이후 우승에 목말라 했던 SK는 정대현을 위시로 한 ‘벌떼 마운드’를 가동, 3회(2007, 2008, 2010)나 정상에 올랐다. 정대현이 '여왕벌'로 불리는 이유다. 

류현진(LA 다저스)이 KBO에서 메이저리그(MLB)로 직행한 첫 번째 투수로 2013년부터 연착륙했으나 사실 정대현이 먼저 길을 닦을 뻔 했다. 자유계약(FA)으로 풀린 2011시즌 종료 후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계약했으나 메디컬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해 진출이 무산되고 말았다. 빅리그에선 극히 드문 언더핸드인데다 대체 불가 지저분한 구질로 성공 가능성이 높아 보였으니 아쉬움이 컸던 사건이었다.

레전드 우타자인 마해영에게 “현역 시절 가장 상대하기 힘들었던 투수가 누구였냐”고 물었더니 망설임도 없이 정대현이라고 하던 기억이 난다. '한 야구' 했던 통산 260홈런 타자 마해영 코치는 “정대현 공은 마구였다”며 “한참 멀어 도저히 칠 수가 없었다”고 넋두리했다. 리그를 초토화시켰던 이대호(롯데)도 전성기 정대현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졌다.

낮은 릴리스 포인트 탓에 무릎 부상을 달고 살아 롯데 입단 후 ‘먹튀’ 논란에 시달렸지만 그래도 정대현은 늘 기대감을 품게 하는 투수였다. 투구추적시스템 스트라이크존 구석만 찾아가는 기막힌 제구, 막 떨어지는 싱커와 확 치솟는 커브 조합을 보고 있으면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정대현은 그런 선수였다.

고마웠어요, 여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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